마지막 남은 한 시간인 것 처럼
중고등학교 때 소위 <앙케이트 노트 돌리기>란 것이 유행이었다.
자기만의 앙케이트 노트를 예쁘게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리면
앙케이트 문제에 정성껏 답하고 치장까지 해 주는 일.
그래서 누구의 앙케이트 노트가 가장 멋지게 꾸며지고 많은 아이들이
멋진 답을 써 주었느냐가 인기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했다.
*당신의 취미는?
*당신이 꿈꾸는 이상형은?
...뭐 이런 흔하고 뻔한 질문들이었는데
꼭 빠지지 않던 마지막 문제..
*지구가 한 시간 후 멸망한다면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?
뭐..누구의 말을 빌어
-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..부터 시작해서
소녀들의 간지러운 답들이 다양하게도 적혀 있었다.
공주과였던 한 친구는 내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.
-욕조에 향기나는 거품비누 풀어놓고 목욕을 하며 세계종말을 기다리겠다.
이그.. 영낙없이 지금도 그리 철없이 공주처럼 산다.
한 친구의 답.
-잠이나 실컷 자야겠다.
이 친구. 잠 줄여가며 공부하느라 잠이 부족한 아이도 아니었다.
-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공부하겠다
평소에 공부하고 담 쌓던 친구다. 하하.
-고급식당에 가서 한 시간동안 비싼 음식 시켜서 실컷 먹겠다. 계산은 후불이니까.
차라리 이건 애교이다.
가끔..
정말 내 삶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기다린다면
나는 무엇을 하면서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? 하는 생각을 해 본다.
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신가.
십여년 전. 좀 많이 아플 때.
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하던 일이 생각난다.
입원을 하기 전.
집안 청소. 싱크대 청소. 옷장 정리....
내가 만약 돌아올 수 없더라도 내가 남긴 흔적이 깨끗하기를 바라며
말끔하게 정리하고 엄마 아버지를 뵙고 친구들과 통화하고
행여 나쁜 감정을 정리 못 했던 사람과는 말끔히 풀고
마지막으로 미장원 가서 머리를 정리하고
내 부끄러운 삶을 회개하며 나의 연약함을 의탁하는 기도를 하고...
그런 웃지 못 할 일들을.
입원할 때 마다 되풀이 했었다.
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듯이...
그때는 정말이지 앞 날을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.
그렇게 <마지막을 준비하며 주변정리>를 하는 마음으로 살던 시절의
내 마음가짐이란 비장했고 너그러웠고 감사했고 모든것이 감동이었다.
그런데 건강해 지고 몸과 마음이 편해지자 점점 느슨해졌다.
적당히 게을러지고 가진 것 보다 갖고 싶은게 더 많다는 욕심이 생기고
감동할 일이 있어도 조금은 무뎌지고 너그러움 보다는 나를 앞세우려는
고집도 세어져 갔다.
며칠 전 시장에 다녀오다 아파트 앞 비보호 횡단보도를 건너다 하마터면
차에 치일 뻔 했다.
딴 생각하며 다가오는 트럭을 보지 못 하고 인도에서 막 차도로 내려서는데
부아~앙.
바로 내 앞을 휙 지나가는 커다란 트럭의 뒷바퀴를 바라 보면서
이처럼 마지막 순간은 부지불식 간에 찾아오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.
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되
오늘 이 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한 시간인 것 처럼
진지하고 값지게 최선을 다 하고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.
오늘 갑자기.
여고시절의 앙케이트 노트 맨 마지막 문제가 생각이 났다.
난 묵상하면서 진지하게 내 삶을 뒤돌아 보았다.
한 시간 후 내 삶이 끝난다 해도 허둥대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
아쉬워 하지 않고 부끄러워서 주저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맞이 할 만큼
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.
그치만 여러분에게 이리 심각한 문제를 내드리기엔 너무 죄송하다.
그래서 이렇게 제안한다.
자아~
여러분은 지금 꿈많은 고등학생이 되는거다.
장난꾸러기 친구 한나가 앙케이트 노트를 돌린다.
그러니 가볍게 받아들고 답을 한번 적어보시면 좋겠다.
성실하게 답변을 해 주십사 부탁을 드린다.
나도 곰곰이 생각하고 답을 써 볼 참이다
*********삶의 마지막 한 시간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?***********